강윤서

June 2, 2016 11:8 am

# 남자로 살면서 머리 길러보는 글

처음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머리를 길러야겠다고 생각한건 아니었다. 어디선가 "머리가 길면 곱슬머리 티가 덜 난다"는 말을 들어버려서 별 생각 없이 머리를 기른 게 그 시작이다.

그런데 머리를 기르다 보니 점점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첫번째 오기는 주변 형들의 "이야... 나도 그 나이 때 머리 기르고 다녔는데" 라는 말 때문이다. 기왕 기르는 거 "와... 나도 저렇게까지 길러본적은 없었다” 라는 말이 듣고 싶어졌다. 진짜 쓸데없는 오기랄까.

두번째는 생각보다 헤어디자이너들이 남자가 머리 기르는 데에 비협조적이라는 것이다. 내가 머리를 길러봤자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어서인지, 머리를 기르면 미용실에 올 일이 적어져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만난 헤어디자이너중 대부분이 대략 이런 태도였다. "에이 남자가 뭘 머리를 기르고 다녀요. 내가 이쁘게 잘라줄게 맡겨줘 봐" 이런 말을 들으니까 왠지 더 오기가 생겼다. 원래 하지 말라는 거 더 하고 싶자나... 지금은 우연히 홍대 근처에서 좋은 헤어디자이너분 만나서 가끔 거기로 머리 정리하러 간다. 살짝 특이한 분인데 남자+장발인데다 내가 머리를 기르고 싶다니까 막 상세하게 어떻게 길르고 염색은 언제하고... 이런 컨설팅? 받았다. 짱 친절하심

그런데 이렇게 오기로 시작한 머리 기르기가 요즘은 나에게 뭔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것도 사실이다.

의외로 머리 기르기 시작하면서 "너 게이야?"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 질문은 진짜 이상한 것 같다. 그 질문에 내가 게이라고 대답하는 것도 이상하고 아니라고 대답하는 것도 웃기다. 그렇다고 "나는 대답하기 싫은데?"라고 답하기도 거시기하다. 무슨 답을 해도 이상하니 질문이 이상한것일 수 밖에. 아니 애초에 머리 길면 다 게이인가? 오히려 머리 짧은 게이가 더 많을 것 같은데…

생각해보건대 머리가 긴 남자를 보고 게이냐고 묻는 건 크로스 드레서와 트랜스 젠더, 그리고 게이를 개념적으로 구분해서 나오는 질문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남자는 이래야 해’ 라는 사회 통념의 산물이 아닐까 싶다. 이를 방증하는 게 머리가 길다는 이야기에 꼭 따라붙는 군대 이야기이다. “남자가 머리가 그게 뭐냐” 라고 묻는 사람들의 십 중 팔, 구는 “그럼 군대갈때 머리 자르겠네”라는 말을 굳이 덧붙인다. 나로 하여금 머리가 짧고 현역으로 군대를 갔다 오는 ‘정상적인 남자’로 편입해 주려는 시도랄까.

나는 이런 태도를 마주할 때마다 불편함을 느끼는 동시에 반성하기도 한다. 나도 사회적 통념에 의거한 젠더를 남에게 강요하는 실수를, 무의식적으로 얼마나 저지르고 다녔을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이럴 때마다 젠더 문제에 대한 나의 태도를 정비하는 계기가 되는데, 나처럼 젠더문제에 있어서 무지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안전한 스탠스는 젠더적 편견을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남자는 이래야 해” 내지는 “여자는 이래야 해” 따위와 같은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그걸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노력하고는 있다.

어찌 되었건 머리는 계속 기를 것 같다. 꼴볼견인 건 알겠지만, 딱히 남 보여주려고 기르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