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odot

November 11, 2014 4:3 pm

알베르 카뮈 - 시지프 신화 메모

앞에서 나는 이 세계가 부조리한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지나치게 성급한 말이었다. 그 자체로 놓고 볼 때 이 세계는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다. 그러나 부조리한 것은 바로 이 비합리와, 명확함에 이르려는 필사적인 열망과의 맞대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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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키에르케고르)는 위안, 도덕, 안식의 원리 일체를 거부한다. 그는 자신의 심장에 박힌 가시의 고통을 진정시키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고통을 일깨우며 십자가 형을 달게 받는 자가 느끼는 절망적 기쁨 속에서 명증성, 거부, 희극 등 악마적인 것의 범주를 하나씩 구축해나간다. 다정하면서도 냉소적인 이 얼굴, 영혼의 밑바닥에서 울려나오는 절규를 동반한 이 표변, 이것은 바로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은 현실과 대결하는 부조리의 정신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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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키고르는 이렇게 외치며 경고할 수도 있다.

"만약 인간에게 영원한 의식이 없다면, 만약 모든 사물의 근저에 있는 것이라고는 어두침침한 정념의 소용돌이 속에서 큰 것, 하찮은 것, 등 모든 사물을 산출하는 원시적이고 소용돌이치는 힘 뿐이라면,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바닥 없는 공허가 만물 밑에 숨겨져 있다면, 도대체 삶이란 절망 외에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 외침은 부조리의 인간을 멈추게 할 만한 것은 아니다. 무엇이 진실인가를 찾는 것은 무엇이 바람직한가를 찾는 것과는 다르다. 만약 “도대체 삶이란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괴로운 질문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당나귀처럼 환상의 장미꽃을 먹고 살아가야 한다면, 부조리의 정신을 단념하고 허위에 몸을 내맡기기보다는 차라리 두려움 없이 “절망”이라는 키에르키고르의 대답을 선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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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건을 벗어나는 의미가 존재한들 그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오직 인간적인 언어로 된 것만을 이해할 수 있을 따름이다. 내 손에 만져지는 것, 나에게 저항해오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절대와 통일을 향한 나의 열망과 이 세계를 합리적이고 순리적인 원리로 환원시킬 수 없다는 불가능성, 이 두 가지 확신을 서로 타협시킬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서야, 내가 가지고 있지도 않은 희망, 나의 조건의 한계 안에서는 아무런 뜻도 없는 희망을 개입시키지 않고서야, 도대체 내가 그 밖에 무슨 다른 진실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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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내가 뭇 나무들 중 한 그루의 나무라면, 뭇 짐승들 중 한 마리의 고양이라면, 이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차라리 이런 문제 자체가 제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 세계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내 모든 의식과 친숙함에의 요구를 통해서 내가 맞서고 있는 이 세계 자체가 되어버릴 것이니까 말이다. 이토록 보잘것없는 이성, 바로 이것이 나를 모든 창조물에 대립시켜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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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곧 부조리를 살려놓는 것이다. 부조리를 살린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부조리를 주시하는 것이다. (중략) 따라서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철학적 태도는 곧 반항이다. 반항은 어떤 불가능한 투명에의 요구다. (중략) 반항은 인간이 자신에게 끊임없이 현존함을 뜻한다. 반항은 갈망이 아니다. 반항에는 희망이 없다. 반항은 짓눌러오는 운명의 확인이다. 그러나 그런 확인에 따르기 마련인 체념을 거부한 채의 확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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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다' 고 이반 카라마조프는 외친다. 이 말에도 역시 그 나름의 부조리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 말을 통속적 의미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그렇다. 과연 사람들이 똑똑히 주목해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해방과 기쁨의 외침이 아니라 하나의 쓰라린 확인인 것이다.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줄 어떤 신이 있다는 확신은 벌받지 않고 악을 행할 수 있는 능력보다 훨씬 더 매혹적이다.

돈 후안의 경우, 사람들이 비웃으면 비웃을수록 그의 얼굴은 더욱 뚜렷하게 부각된다. 이렇게 하여 그는 낭만주의자들이 그에게 뒤집어씌운 모습을 거부하는 것이다. 괴로움에 시달린 가련한 돈 후안을 비웃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들은 그를 동정하고 하늘도 그를 구원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돈 후안이 예감하는 세계 안에서는 우스꽝스러운 것도 ‘또한’ 포함되어 있다. 그는 벌받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이 게임의 규칙이다. 그리하여 게임의 모든 규칙을 통째로 다 받아들였다는 것이 바로 그의 고결함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옳다는 것, 그것이 벌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한 운명이 벌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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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 인간은 발걸음을 멈추고 늑장부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그를 재촉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자신보다 더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특히 실제의 자신보다 장차 자기가 변해서 될 어떤 존재에 대하여 온통 관심이 쏠려 있는 것이다. 무대 위에서는 숱한 운명들이 그에게 제시되고 있어서 그는 이 운명들의 쓰라림을 겪지 않은 채 시적 흥취만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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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세계의 부조리를 지탱해나감으로써 맛볼 수 있는 형이상학적 행복이란 것이 존재하게 된다. 정복 혹은 연기,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사랑, 부조리한 반항, 이런 것들은 미리부터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는 전장에서 바로 인간이 자신의 존엄성에 바치는 경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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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그의 생활로 되돌아가는 이 미묘한 순간에 시지프는 자기의 바위를 향하여 돌아가면서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이 행위들의 연속을 응시한다. 이 행위들의 연속은 곧 자신에 의해 창조되고 자신의 기억의 시선 속에서 통일되고 머지않아 죽음에 의해 봉인될 그의 운명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적인 모든 것은 완전히 인간적인 근원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하면서, 보고자 원하되 밤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장님인 시지프는 지금도 여전히 걸어가고 있다. 바위는 또다시 굴러떨어진다.